여행스케치/풍경들

만경대(萬景臺)와 망경대(望京臺)

하시청천 2007. 12. 18. 15:55

 고려충신 松山조견(趙狷)先生과 망경대(望京臺)

중간에 낮은 봉우리가 망경대     

 

고려충신 조견선생(1351~1425)은 이곳에 설단봉향(設壇奉享)한 平壤趙氏 시조 조춘(趙椿, 樞密院副使)의 8세손이고, 청계사(淸溪寺)를 중창(重刱)한 조인규(趙仁規, 문하시중, 정숙공)의 曾孫이다. 公의 초휘는 胤이고 호는 松山이며 시호는 平簡公이다.

공의 여조(麗朝)벼슬은 지신사(知申事, 도승지)까지 올랐고, 여조말 조정(朝廷)에서 공의 굳은 志操를 꺽을 수 없음을 알고 영남안렴사(嶺南按廉使,관찰사)로 외직케 하고, 이태조가 개국하자 공은 통곡하며 두류산(頭流山, 현 지리산)으로 들어가 이름도 견(狷)으로 고치고, 자(字)도 종견(從犬)이라 하였으니, 이는 나라가 망해도 죽지 않음이 개와 같고, 또 개는 옛주인을 알아보는 의(義)를 취함이다.

이태조가 공의 절개를 찬양하고 재주를 아껴서 호조전서(戶曹典書, 판서)의 벼슬을 내렸으나, 공은 끝내 사양하고 서산의 고사리캐기(백이숙제의 절개)를 원한다 하며 곧 청계사로 은거하고, 상봉인 망경대(望京臺)에 올라 매일 송도(松都)를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서쪽 약 100m 아래 바위굴인 “마왕굴” 일명 “오망난이굴”에서 흘러나오는 찬물로 갈증을 달래던 곳이다.

망경(望京)은 원래 만경(萬景)이라 하여 이곳에  오르면 눈아래 만경(萬景)이 전개된다는데서 유래한 이름 이었으나, 공께서 이곳에 올라 개경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하여 세인들이 망경대(望京臺, 고려의 서울을 바라 보던곳)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이태조가 공의 형인 조준(趙浚, 文忠公)을 대동하고 청계사로 �아 갔으나 상견(相見)되지 않아, 군신지간(君臣之間)이 아닌 dpt 정의에 의한 붕우지예(朋友之禮)로 상견을 청하여 서로 읍만하고 마주 앉아 새조정에 나와 도와 주기를 간청했지만, 공의 굳은 지조는 금석과 같아서 가히 뺏을 도리가 없다 하고, 청계산의 한면을 공을 위해 봉(封)하고 석실(石室)을 지어 그의 정절(貞節)을 기리라 하였다. 지금의 원통동(圓通洞) 석축이 남아 있는 곳이 바로 그 터이다.

공은 양주(楊洲) 수락산 기슭의 한 마을(현 의정부 송산마을)로 은거하자, 그분과 뜻을 같이 하던 여말 충신들이 그곳으로 모여 은거생활을 하다가 공은 75세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후세에 공이 살던 곳을 그분의 호를 따서 송산(松山)이라 부르고 있고, 살던터에는 유허비()세웠으며, 그 마을에 지역 사림들이 송산사(松山祠, 경기도 문화재 제42호)를 중건하여, 송산공을 주벽으로하여 여섯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양주에도 정절사(旌節祠, 사천서원)를 세워 송산공, 남을진(南乙珍) 두분을 모시고, 6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사림들이 매년 제사(祭祀)를  올리면서 그분의 충절을 추모하고 있다.

공의 묘소는 성남시 여수동에 있고, 공의 묘비에 고려 관직만 쓰라는 유훈(遺訓)을 남겼으나, 이조에서 내린 벼슬을 새겨 넣었다가 천둥번개가 내리쳐서, “조공지묘(趙公之墓)” 넉자만 남겨 보존 되고 있다. 공의 묘역 앞에는 근년에 신도비도 새로 세워졌다.

공의 불천위신주(不遷位神主)를 모신 사당은 공주시 우성면에 중건되어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내문 옮김)

'여행스케치 > 풍경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덕산 상해봉에서 본 풍광  (0) 2007.12.24
광덕산에서 본 풍광  (0) 2007.12.24
상고대와 설화의 만남  (0) 2007.12.17
계방산 설화  (0) 2007.12.17
대둔산 마천대 전경  (0) 2007.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