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여행

촉석루

하시청천 2007. 9. 14. 17:31

 

 

촉석루안에 남장대라는 현판이 있다.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8호. 정면 5칸, 측면 4칸. 고려 말의 진주성()을 지키던 주장()의 지휘소이다. 1365년(공민왕 14)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왜적이 침입하자 총지휘는 물론 남쪽 지휘대로 사용하였으므로 남장대()라고도 하였다.

촉석루에 관한 기록을 보면 《진양지()》에 고려 때 김중선() 등이 진주성 수축시 신축하였다고 하였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김주()가 영남루()를 중건할 때 촉석루를 본보기로 하였다고 되어 있다. 누기()에는 조선 초 목사 권충()과 판관 박시결()이 중건하고 하륜()이 누기를 지었다고 되어 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의기 논개가 낙화(), 순국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현재의 건물은 1973년에 재건된 팔작지붕의 와가()이다. (네이버 참조)

 

촉석루에서 내다본 풍경

 

 

2000년 1월 31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53호로 지정되었다.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2차 진주싸움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여 명의 민·관·군이 순절한 뒤 촉석루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논개()의 공적비이다.

의암에서 촉석루로 올라가는 길목 암반 위의 비각 안에 세워져 있는데, 명암() 정식(1683∼1746)이라는 선비가 진주 사민()들로부터 금품을 모아 논개 의거의 징표로서 1722년(경종 2)에 다듬은 것이다. 비문에는 설화문학의 대가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기록된 내용을 인용하여 정리하고 논개를 기리는 정식의 시가 새겨져 있다.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기와로 된 맞배지붕 건물이며 양쪽에 풍판을 달았다. 비석을 다듬어 놓은 해로부터 18년 뒤인 1740년(영조 16) 가을에 진주우병사 남덕하()가 왕의 명을 받고 이듬해 봄에 비를 세우고 비각을 지었다. 비각에 걸려 있는 현판에는 ‘의기논개지문()’이라는 남덕하의 글씨가 씌어 있다.

논개의 사적을 기록한 금석자료로서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의 상황과 논개의 순국사실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비의 크기는 가로 60㎝, 세로 145㎝, 두께 15㎝이며, 진주시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네이버 참조)

 

의암은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바위이다.
조선조 선조 26년(1593) 6월 29일,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논개는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유인하여 이 바위에서 순국하였다. 이에 논개의 순국정신을 현창하기 위해 영남사람들이 의암이라고 명명하였다.
인조 7년(1629) 진주의 선비 정대륭(鄭大隆:1599∼1661)은 바위의 서쪽 벽면에 의암이라는 글자를 전각하였고, 남쪽에는 한몽삼(韓夢參:1598∼1662)이 쓴 것으로 전하는 의암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의암의 바닥 넓이는 3.65m×3.3m이다. 옆의 암벽에는 “한 줄기 긴 강이 띠를 두르고, 의열은 천년의 세월을 흐르리라(일대장강(一帶長江) 천추의열(千秋義烈))”는 글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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